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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 문화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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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유적
【국가 특별사적】1300년 전에 새워진 이 유적은 규슈의 정치・문화적 중심지였으며, 일본의 외교 및 대외방비를 위한 선진적인 거점이었던 다자이후의 중추였습니다. 헤이조 궁 등과 같은 조당원(朝堂院) 형식으로 만들어진 정청, 주변 관아(官衙), 외국사절을 맞이하기 위해 마련된 객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다자이후에 부임한 자들은 견당사 경험자 등 국제적으로 활약한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정청유적의 주변 경관은 잘 정비되어, 고대의 정청을 상상케 하는 멋진 장소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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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관 유적
[국가 특별사적] 고대 다자이후는 규슈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이며 일본의 대외 방비의 선단 거점이었습니다. 또한 조정을 대신하여 외국 사절을 접대하고 교역을 하는 역할도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마을에는 다자이후를 방문한 외국 사신이 머무는 객관도 마련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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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성(大野城) 유적
[국가 특별사적] 1350년 전 백제에서 망명한 귀족들과 함께 자연지형을 살려 축조한 고대산성입니다.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의 부소산성을 본떠, 미즈키(성) 등과 함께 백제식 도성의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 그 역사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다자이후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멀리로는 현해탄까지 내다볼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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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키(성) 유적
[국가 특별사적] 1350년 전 백강전투에 패한 후 일본을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축조된 성채입니다. 물을 저장했던 해자와 흙으로 쌓아올린 성채(토루)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금도 길이가 1.2km나 되는 거대한 토루를 볼 수 있습니다. 백제의 수도였던 부여의 동나성(東羅城) 성벽과 같은 축조기술이 채용되었습니다. 미즈키(성)은 후에 다자이후의 출입구가 되어, 외국사절이나 수도에서 온 관료들을 맞아들인 수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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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제온지(절)·가이단인(절)
[국가 사적] 간제온지(절) 경내 및 자원(子院) 유적과 로지 기와가마 유적 [국가 중요문화재] (조각) [후쿠오카현 유형문화재] (건조물·공예)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斉明天皇)을 추선하기 위해 텐지 천황(天智天皇)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원입니다. 주변에 49개의 자원(子院-작은 사원)이 있었다고 하며, 가람(伽藍)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초석 등이 남아 고대의 번영을 보여줍니다. 이 절은 대륙에서 유래된 무악을 연주하는 악단을 갖추고 있으며 능왕(陵王), 나소리(納曽利)의 탈(국가 중요문화재)이 현존합니다. 또한, 낙경법요(落慶法要-사찰의 건축공사가 낙성된 기쁨을 축하하는 의례)를 행한 승려 겐보(玄昉)의 무덤이 남아있습니다.가이단인(절)에는 계단(戒壇-승려가 계율을 받는 단)이 전해지고 있는데, 간진(鑑真)과 구카이(空海) 승려가 이 절에 머무르며 처음으로 수계를 베푼곳으로, 천하의 삼계단(天下三戒壇)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안치된 16채의 불상(국가 중요문화재)은 헤이안~가마쿠라 시대(794~1333년)의 세련된 조상(造像)으로 불교문화가 계속해서 전해졌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현재도 이곳 간제온지(금당과 강당은 후쿠오카현 유형문화재)와 가이단인(본당, 종루, 종은 후쿠오카현 유형문화재)에서 법등(法灯)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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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쿠젠 고쿠분지 유적
[국가 사적] 쇼무 천황(聖武天皇)의 명으로 전국에 건립한 고쿠분지(절) 중 하나입니다. 주변에서 호적대장 목간이 발견되어 국부 등 치쿠젠국 관련 시설도 근처에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주변 경관에서당시의 모습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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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학교원 유적
[국가 사적] 다자이후에 있었던 관료 양성 기관의 유적입니다. 사이카이도(西海道-규슈지방의 옛 이름)의 각 지방 관료 자제들이 이곳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이곳에 다자이후 장관 대리(大宰権帥) 관직에 있던 오에노 마사후시(大江匡房)가 책 『고우케시다이(江家次第)』에 “기비노 마키비(吉備真備-지방호족)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의 초상화가 안치된 시설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현재 공자묘(孔子廟)에 대대로 심어져 내려오는 황련목의 수종을 공자의 후손들에게 받아 키온 것이 현도(県道) 길가에 심어져 있습니다. (2015년 여름에 태풍으로 3그루 중 2그루가 부러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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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부 기와 가마 유적
[국가 사적]치쿠젠 고쿠분지 유적의 북동쪽에 있는 기와가마 유적입니다. 이 가마는 벽과 천장 부분에 말린 벽돌이 사용된 상행 가마(登り窯-노보리 가마)입니다. 8세기 중엽 무렵의 것으로 보이며, 치쿠젠 고쿠분지의 창건 기와를 구울 때 사용된 가마로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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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만산
[국가 사적] 다자이후의 북동쪽에 솟은 해발 829m의 산으로 옛날에는 미카사산(御笠山)이라고 불렸으며 아름다운 산세를 자랑합니다. 나라(奈良) 시대(710〜794년)부터 산에서 국가적인 국경 제사를 지냈습니다. 헤이안 시대 승려 사이쵸(最澄)는 당나라에 들어갈 때 이곳에 약사여래상을 새겨 항해 안전을 기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귀국 후 일본 육소보탑(六所宝塔)을 발원하여 이곳에 안서탑(安西塔)을 건립하였습니다. 중세에는 사원과 다자이후를 수호하는 객사가 지어져, 그곳에서는 해외교역 등도 이루어졌습니다. 현재는 가마도 신사(竈門神社)의 사유지가 되어, 고대에 제사를 지내던 호만산의 정취를 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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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국보)
[국보 (공예품)] 간제온지(절)의 종각(鐘楼)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입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가 읊은 한시 ‘불출문(不出門)’에서 등장하는 바로 그 종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고대에 울려펴진 범종의 소리는 지금도 변합없는 음색으로 울려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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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텐만구(신사)
국보 (書跡:필적)국가 중요문화재 (건조물)처음에는 다자이후 장관 대리(大宰権帥) 관직으로 다자이후에서 서거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의 묘에서부터 시작되어, 텐만구 안락쿠지(天満宮安楽寺)라고도 불렸습니다. 헤이안(平安)시대(784~1185년)에는 중국에서 유래된 ‘곡수의 연(曲水の宴)’ 등의 행사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도 있습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문인으로도 칭송받아 귀족과 무사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참배를 하였습니다. 문예의 성지가 되어 연가(連歌-두 사람 이상이 와카(和歌)의 상구와 하구를 서로 번갈아 읽는 형식의 노래) 등이 끊임없이 봉납되고 있습니다. 또한 당나라 서책인 ‘한원(翰苑)’의 헤이안 시대 사본이 남아있는 곳입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고려에서 보낸 사신인 ‘고유(高柔)’가 참배하고 시를 봉납하였습니다. 본전은 국가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통행사와 어우러진 경내에 들어서면 고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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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텐만구 진코(神幸) 행사
[후쿠오카현 민속문화재](무형) 헤이안(平安) 시대 (1101년) 다자이노 곤노 소치(大宰権帥) 관직에 있던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에 의해 시작된 진코 행사입니다. 매년 9월 다자이후 텐만구에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귀양지였던 부(府)의 남관 유적(현재는 에노키샤 신사)까지 고대 구획을 잇는 길을 신체(神體)를 가마에 모시고 행렬합니다. 진코 행렬은 가마를 중심으로 400〜700명이 고대 의상을 입고 함께 참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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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텐만구의 전통 행사
미지정(무형) 헤이안(平安) 시대에 다자이후의 고급 관료에 의해 궁중의 연중행사를 다자이후로 옮기고 그에 더해 텐만 신전에서 행하게 된 것으로, ‘사도의 연(四度宴-연 4회 열리던 행사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이라고 불렸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기원한 ‘곡수의 연(曲水宴)’, ‘칠석의 연(七夕宴)’, ‘잔국의 연(残菊宴)’이 있으며, 연회에서는 노래와 한시를 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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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엽집(万葉集) 츠쿠시 가단(万葉集筑紫歌壇)
미지정(무형)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엽집에 실려있는 약 4500수의 노래 중 츠쿠시(筑紫)에서 만들어진 노래는 약 320수가 있습니다. 나라(奈良) 시대의 진키~텐표년(神亀~天平年:724~749년) 동안에 다자이후시에 머물며 만엽집의 시를 남긴 시인 집단을 ‘만엽집 츠쿠시 가단’이라고 하는데, 특히 다자이후 장관(大宰帥)이었던 오토모노 타비토(大伴旅人)의 관저에서 열린 ’매화 연회’에서 그들이 읊은 시는 유명합니다. 당시에 ‘매화’는 당나라에서 건너온 신기한 선진문물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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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조방 유적
미지정(유적) 고대 동아시아의 수도에서 채택되었던 바둑판식 구획을 가진 도시 유적입니다. 아스카 시대에 조영되어 나라(奈良)시대(710〜794년)에는 정청과 주작대로를 갖추었습니다. 그 모습은 당나라의 장안성을 모방한 헤이조쿄(平城京)와 유사하여, 설계 및 조영은 헤이조쿄 조영 책임자가 담당했습니다. 지금도 도시 곳곳에 조방(条坊)의 흔적을 가진 구획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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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官道)
미지정(유적) 다자이후의 출입구가 된 미즈키(성)의 동・서문을 통과하는 직선 도로입니다. 서문 루트는 지금의 후쿠오카 시내에 있는 해외 교역시설인 치쿠시노 무로츠미(筑紫館-코우로칸(鴻臚館)이라고도 함)와 다자이후를 잇는 길로 외국사절단은 아 길을 이용해 다자이후로 들어갔습니다. 동문 루트는 하카타와 연결되어 있어 도성에서 부임한 관료들이 이용한 길로 보입니다. 동・서문 루트는 현재 시도(市道)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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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단인 출토지
미지정(유적) 국가 중요문화재(고고 자료) 옛 다자이후에 있었던 ‘치쿠젠국(筑前国)’이라는 지방에는 4개의 군단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 2개 군단의 구리도장인 ‘미카사 단인(御笠団印)’과 ‘오카 단인(遠賀団印)’(양쪽 모두 국가 중요문화재)이 발견된 장소입니다. 이것으로 다자이후 조방의 북서쪽 끝에 다자이후 치쿠젠국을 수비한 군인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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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냐지(절) 유적
다자이후시 지정 문화재(사적) 국가 중요문화재(건조물) 고토쿠 천황(孝徳天皇)의 질병이 쾌유되기를 기원해서, 츠쿠시 다자이 소치(장관) 소가노 히무카가 세웠다고 하는 고대 사원입니다. 나라(奈良) 시대 (710~794년)에 조방 내에 이설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방 내의 사원은 간제온지(観世音寺)와 한냐지(般若寺)와 같이 천황과 관련된 사원뿐이었습니다. 탑 기단(塔基壇:탑의 기초가 되는 단)과 탑 심초(塔心礎:탑의 가운데에 세우는 기둥의 기초)가 발견되었고 가마쿠라 시대 (1185년~1333년)에 조립된 석재의 7층탑(국가 중요 문화재)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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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관(南館) 유적
미지정(유적) 다치(館)는 도성에서 부임해 온 사람의 관사이며 이 중 ‘남관’은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가 귀양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 미치자네를 애도하여 다자이후 차관(大宰大弐)이었던 후지와라노 코레요리(藤原惟憲)가 1023년에 조묘인(浄妙院)을 건립하고, 1101년에는 다자이후의 장관 대리(大宰権帥) 오에노 마사후사(大江匡房)에 의해 조묘인과 텐만구를 연결하는 진코(神幸) 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장소는 지금까지 이어져 ‘에노키샤(신사)’가 되었습니다. 근처에는 객관 유적이 있고 주작대로 주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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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매화
미지정(천연 기념물) 나라(奈良) 시대(710~794년), 봄애 가장 먼저 피어 그윽한 향을 풍기는 ‘매화’는 당나라에서 건너온 선진문물 중 하나였습니다. 만엽집에는 ‘매화 연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자이후에서도 매화 구경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특히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매화를 각별이 사랑한 것 때문에 ‘토비우메(飛梅) 전설’, ’조묘니(浄妙尼) 전승’과 함께 다자이후와 다자이후 텐만구는 ‘매화’라는 이미지로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시작했습니다. 텐만구에서는 지금도 매화나무 봉납행사가 행해지고 있으며, 시내의 많은 집 정원에도 매화나무가 심어져 있습니다.‘토비우메(飛梅) 전설’은 미치자네를 사모한 매화가 하룻밤 새에 도성에서 다자이후까지 날아왔다는 전설로, 본전 옆에 있는 나무가 그것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조묘니(浄妙尼) 전승’은 다자이후에서 힘든 생활을 하던 미치자네에게 구운 떡 등을 매화가지에 꽂아 주거나 미치자네를 여러모로 보살폈던 노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지금은 다자이후 명물이 된 우메가에모치(梅ヶ枝餅)의 시작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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