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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자이후 일본유산에 대해서

고대 일본의 '서쪽 수도'
~ 동아시아와의 교류 거점 ~

일본의 서쪽, 규슈 지역에는 한때 수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자이후입니다.
1300년 전, 그곳에 '대군(천황)의 지방 조정'인 다자이후를 두었고 (『만엽집』), '천하지일도회(天下之一都会-천하제일의 도시)'라고 불렸습니다 (『속일본기』). 다자이후는 고대와 중세에 걸쳐 당시 일본의 도성문화와 함께 해외로부터 들어 온 선진문화로 물들어 있었습니다.

세계와 연결되는 '서쪽 수도'

1300년 전 중국의 당나라가 세계의 제국으로 번성했었습니다. 따라서 주변국들을 당나라의 문물·문화·정치 제도를 서둘러 받아들였고, 일본도 다이호(大宝)의 견당사 아와타노 마히토(粟田真人)가 당나라에서 선진 정보를 가지고 들어와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 역사상 가장 국제적인 시대라고 불린 나라(奈良) 시대(710~794년)를 맞이하게 됩니다.

황제로부터 환대받은 아와타노 마히토가 본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선진적인 도시였습니다. 그가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헤이조쿄와 다자이후가 만들어졌습니다. 츠쿠시(筑紫)에는 텐지 천황(天智天皇) 통치 기간에 미즈키(성)(水城)와 오노성(大野城), 기이성(基肄城) 등 이미 백제의 궁도(宮都)를 본뜬 요새가 구축되어 있었지만, 당나라 도성를 실제로 본 아와타노 마히토가 부임하여 직접 축조에 관여함으로써, '서쪽 수도'로 새롭게 태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미즈키(성)이나 오노성(大野城), 기이성(基肄城) 등 옛 요새를 이용하여 그 안에 약 2km 사방에 걸쳐 바둑판 모양의 도시 구획(다자이후 조방(条坊))을 마련한 본격적인 도성이었습니다. 다자이후 정청과 관련된 관공서를 도시 지역의 북쪽 중앙에 위치시켜 그 전면에 주작대로를 부설했습니다. 그 폭은 장안성 주작대가의 1/4이며, 헤이조쿄 주작대로의 1/2 규격을 갖고 있어 국내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도시에는 거주지와 함께 관료의 자녀들이 다닌 교육기관(학교원), 천황과 연고가 있는 사원인 간세온지와 한냐지, 영빈관(객관) 등 도성와 같은 시설이 마련되었습니다. 지붕에는 수도와 같은 디자인의 연꽃문양의 기와지붕이 늘어서, 견당사인 아와타노 마히토가 당나라에서 본 사자상과 같은 얼굴의 도깨비 기와가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사방으로 뻗어 나간 관도(官道)는 문물・문화 교류에 기여했습니다.

이렇게 다자이후는 동아시아의 국제표준 도성의 사양으로 세워진 도시였습니다. 그것은 이 땅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일본의 국제성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보여주기 위해 고대 국가가 위신을 걸고 쌓아 올린 '서쪽 수도'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외국 사절과 상인들이 왕래하고 해상 수송 물품이 오가는 국제도시가 탄생했는데, 그것은 '서쪽 수도'가 세워지기 전부터 활발했던 국제 교류의 장이었던 치쿠시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외국 사절을 맞이하는 도시

'서쪽 수도'에서는 외국 사절을 맞이하고 국가에 의한 외교·교역이 이루어졌습니다. 사신(내빈)은 먼저 하카타 만에 근접한 영빈관인 '츠쿠시노 무로츠미(筑紫館-코우로칸(鴻臚館)으로도 불림)'로 들어와, 여기에서 다자이후로 향했습니다. 츠쿠시노 무로츠미를 떠난 사절은 직선으로 이어진 관도(官道)를 따라 텐지 천황(天智天皇) 통치 기간에 세워진 미즈키(성)의 서문에 이르렀고, 좀 더 가서 라조몬(羅城門-도성의 정문)에서 다자이후의 거리나 풍경을 보며 주작대로의 북쪽을 향해 가다가 객관에 들어가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외교 의례를 행할 때는 위엄을 갖추고 객관에서 주작대로의 북쪽을 따라 올라가 다자이후 정청으로 향했습니다. 정청에서는 음악과 함께 의례와 환대의 향연이 열렸습니다. 체류하는 사절단을 위해 일본·당나라·신라의 최고급 식기에 담긴 호화로운 음식이 제공되었습니다. 때때로 중국에서 들어온 차도 즐겼습니다.

츠쿠시(筑紫)에 꽃핀 문화

'서쪽 수도' 다자이후에서는 외국에서 온 귀빈들을 대접하기 위해 문화적 소양을 가진 인물이 필요했고, 또한 인적 교류의 거점이기도 했기 때문에 간진(鑑真), 구카이(空海), 사이초(最澄)등의 지식인들도 머물게 되면서 새로운 문화가 들어오고 축적됐습니다. 예를 들어, 헤이안 시대 초기 시문 서화에 뛰어난 오노노 다카무라(小野篁:802~853년)는 다자이 코우로칸(大宰鴻臚館)에서 당나라 사람과 한시를 서로 지어 읊으며 깊은 교류가 하였습니다. 또한, 만엽집에 시가 소개된 다자이후의 장관이었던 오오토모노 타비토(大伴旅人:665~731년)의 관저에서 열린 '매화 연회(梅花宴)'에서는 당나라에서 가지고 온 지 얼마 안 된 매화를 감탄하면서 서로 지은 와카(일본의 시조)를 소개하는 새로운 문화가 생겼는데, 만엽가인(万葉歌人)들은 오노성과 스이타 온천(후츠카이치 온천)을 시작으로 츠쿠시(筑紫)의 풍경에 마음을 실어 와카(和歌)를 읊었습니다.

그 후, 매화는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의 전승과 함께 시대를 넘어 다자이후와 깊은 관련이 있는 꽃으로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다자이후에서 미치자네(道真)는 주작대로에 접한 남관에서 불편한 생활을 보냈다고 하며 사후에는 다자이후 텐만구에서 모시게 되면서 남관과 텐만구 사이에서 진코 행사(神幸行事)가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현재도 계속 진코 행사는 다자이후 조방 등 고대 구획을 따른 길을 이용하여 헤이안 시대의 에마키(絵巻-그림 두루마리)에 나오는 것 같은 우아한 의상을 입은 행렬이 일 년에 한 번 추분(秋分)에 지나갑니다.

선진 문화의 집적(集積)

간제온지(観世音寺)는 "서쪽 수도"에서 펼쳐진 교류로 인해, 많은 문화와 문물이 집결된 모습을 현대에 전하고 있습니다. 간제온지는 텐지 천황(天智天皇)이 발원하여 당나라에서 현종(玄宗) 황제로부터 가사(袈裟-승려가 입는 법의)를 직접 받은 승려 겐보(玄昉)가 낙성을 경하해서 법요(落慶法要)를 올린, 국가가 관리한 절(官寺)입니다. 5m가 넘는 관세음보살상을 비롯하여 수도나 대륙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동상이 차례로 세워졌습니다. 무악단도 배치하여 외국 사절단을 환영하는 향연을 베풀어 대접했습니다. 현재, 당시의 무악에 사용되던 탈이 간제온지에 남아있습니다. 또한, 당나라의 귀화승인 간진(鑑真)은 일본 도착 후, 간제온지에 머물며 정식 승려가 되기 위한 수계(授戒)를 일본에서 처음으로 받았습니다. 그 때문인지 간제온지의 수계를 받는 계단은 천하삼계단(天下三戒壇) 중 하나로 여겨져 많은 승려가 배출되었습니다. 수계(授戒)를 받는 계단(戒壇) 자체가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또한, 구카이(空海) 등 당나라에 다녀온 승려(入唐僧)가 장기 체류하면서 당나라에서 가져온 경론(經論)을 베껴 쓰는 일 등을 했습니다. 간제온지에 있는 구보 범종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真)가 한시 「불출문(不出門)」에서 "간제온지의 종소리를 그저 듣고만 있다(観(世)音寺只聴鐘聲)"고 읊은 바로 그 종(鐘)입니다.

이와 같이, 츠쿠시(筑紫)에 있던 다자이후는 조정이 외교·교역을 하기 위해 마련한 ‘서쪽 수도’였습니다. 그것은 백제 도성와 당나라의 도성를 모방하여 세워진, 동아시아의 선진 문화와 일본 문화가 오가는 장소였습니다. 그 유산은 츠쿠시 땅의 곳곳에서 발견되며, 일본을 대표하는 고도(古都)의 하나로서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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